10·29 참사 한 달…"비난 대신 다음 재난 대비, 사후평가할 때"
'재난 대응 최종 책임자는 국가'…전문가 중심 대책 수립 요구

"의료진이 잘했다, 잘못했다는 이야기에 힘들어한다. 재난 상황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의료진은 없다. 직접 말은 안 해도 '너희 병원이 잘못했다'는 식으로 다뤄지고…"

마이크를 잡은 순천향대서울병원 조영신 응급의학과장이 끝내 말을 흐렸다. 서울 이태원에서 발생한 '10·29참사'를 계기로 재난의료 과제와 대책을 논하는 자리였다. 조 과장은 당시 기억을 더듬으며 몇 차례 숨을 골랐다. 응급의학과 동료들을 언급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자리에 함께한 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참사 현장 인근에 위치한 순천향대서울병원은 당시 사고 직후부터 사상자가 밀려들었다. 응급의학과 의료진 모두 치료에 매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참사 이튿날인 10월 30일 새벽까지 79명이 순천향대서울병원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다. '컨트롤타워'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책임 추궁과 비난은 의료진을 향했다.

"재난은 의료진이 최선을 다해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려운 문제다. 그만큼 (수습) 기간이 끝나면 다음에는 더 잘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개선을 위한 준비 작업보다 '누구를 조사한다'는 소식부터 들려온다."

조 과장이 우려하듯 참사 발생 한 달이 지났지만 참사 수습과 재난 대책 논의는 제자리걸음하고 있다. 현장에 지원하거나 응급실에서 사상자를 담당했던 전문의들은 그날의 상처를 딛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부는 '그날 누가 잘못했는지' 파헤치는데 몰두한 모양새다.

참사 현장에 출동했던 15개 재난의료지원팀(DMAT)은 경찰 특별수사본부 조사 대상에 올랐다. 이들에 대한 국정조사까지 오르내리고 있다(관련 기사: 경찰 조사 받은 이태원 출동 DMAT…醫 “기가 막힌다” 분개). 순천향대서울병원 역시 조사 협조 요구를 받았다.

이를 지켜본 재난의료 전문가들은 지난 29일 대한병원협회가 서울 강남구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파르나스에서 개최한 ‘‘The 13th Korea Healthcare Congress 2022(KHC 2022)’에서 앞으로 재난의료 과제와 대책 논의가 밀려나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재난의료 전문가들은 10·29 참사를 계기로 한국 재난 대응 체계를 되돌아보고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년의사). 
재난의료 전문가들은 10·29 참사를 계기로 한국 재난 대응 체계를 되돌아보고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년의사).

조 과장은 "재난은 국가에 속한 행정과 법제도 관련 기관 모두 합심해 해결할 문제다. 의료도 그 한 부분이다. 의료진이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잘못했다, 잘했다는 결과론적인 문제로 평가하지 말고 그 다음을 준비하고 재난 대응 수준을 끌어올리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 이형민 회장(한림대성심병원) 역시 지금은 사후평가를 통해 앞으로 재난 대응 개선점을 도출할 때라고 했다.

이 회장은 "재난 사고가 일어나면 사후평가가 중요하다. 한국에서 가장 안 되는 게 이 사후평가 부분이다. 그날 모든 일을 적나라하게 올려놓고 하나하나 살피면서 적절했는지, 왜 이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보고 개선을 논하는 것은 전문가의 영역이다. 경찰 조사를 받을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회장은 "매뉴얼대로 하지 않았다고 처벌한다면 매뉴얼이 의료진의 족쇄가 될 수 있다. 그날 출동한 의료팀에게 이 시간에 뭐 했는지, 누가 했는지를 조사하면 앞으로 누가 (재난 대응에) 참여하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의료진에게 열정과 의무감으로 해결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재난 대응은 국가 시스템의 문제"라면서 "이제라도 전문가 평가단을 만들어 그날 있었던 모든 자료를 공개하고 전문가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잘잘못이 아니라 개선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임자는 국가'…전문가 중심으로 재난 대응 정책 신속히 수립해야

현재 재난 대응 인프라가 민관 협력으로 작동하는 만큼 정부가 전문가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민간을 중심으로 재난 대응을 평가하고 개선점을 도출하면 궁극적 책임자로서 국가가 이를 적극 실행하는 구조가 돼야 한다고 했다.

이 회장은 "현재 한국 재난 대응은 민간(의료기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작 민간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민간에 재난 대응을 위탁하고 민간이 재난 상황에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들고자 한다면 민간 전문가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는 전문가들이 재난의료 대응법을 기획할 여지가 너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나라에서 지정해 운영하는 (재난거점)병원이 갖춰야 할 재난 인프라와 시설 장비는 물론 이를 사용하고 관리하는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 이를 위한 정부 지원도 필요하다"면서 "지금까지 재난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재난 준비는 결국 국가가 해야 한다. 어떤 개인이나 병원 차원에서 준비할 수 없다. 국가는 민간 전문가 의견을 반영해 재난 대응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림대동탄성심병원 왕순주 권역응급의료센터장은 민간 전문가가 주도한 참사 백서 제작을 강조했다. 재난 발생 과정과 대응에 관련한 모든 내용을 정리하고 분석해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고 했다.

왕 센터장은 "백서를 공공이 주도하면 나오기 쉽지 않다. 민간에서 주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정부가) 꺼린다. 민간 전문가가 제작을 돕기도 하지만 모든 내용을 밝히는 데 한계가 있다. 또 사회적 관심이 사라진 뒤에야 굉장히 늦게 나온다"고 지적했다.

왕 센터장은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백서는 한국연구재단 정책 과제로 진행돼 민간 전문가 주도로 만들 수 있었다"며 "핵심은 민간 전문가가 참여해 빠르게 제작하는 것이다. 정책 반영이 빨리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면 백서를 만드는 중간에라도 지금까지 나온 내용을 피드백해 정책에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재난의료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도 강조됐다. 정책을 마련하고 인프라를 확충해도 국민 인식이 따라오지 않으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한재난의학회 김인병 회장(명지병원)은 "코로나19 상황에서 감염병 대응에 사회 관심사가 쏠린 사이 재난의료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면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차원에서 재난의료 시스템 교육과 훈련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번 10·29참사를 의학적 입장에서 봤을 때 전 국민 수준의 인식과 대비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매뉴얼을 얼마나 지켰느냐 누가 잘했느냐 잘잘못을 따지고 들어가기보다는 앞으로 우리 사회 인식 전환과 개선을 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 좌장을 맡은 동군산병원 이성규 이사장은 "군대는 평시에도 항상 전쟁을 대비하고 훈련하고 대규모 예산을 투입한다. 하지만 막상 보건 분야에서는 국민의 생명을 위한 훈련이나 준비에 소홀하다"면서 "아직 갈 길이 멀다. 정부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하는 (재난의료 분야) 준비를 추구해야 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의료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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