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출혈로 쓰러진 흉부외과 교수, 끝내 극단적 선택
유족 ‘직무상 재해’ 주장했지만 법원에서도 패소
다른 나라도 ‘의사 번아웃’ 심각…美 매년 400명 자살

결핵·비결핵항산균(NTM) 분야 권위자 고원중 교수의 죽음은 의학계에 충격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의사 한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 대학병원에서 18년 가까이 환자를 치료해 온 흉부외과 교수 A씨다.

A교수는 지난 2019년 8월 3일 바닷가에서 쓰러졌다. 뇌출혈이었다. 즉시 근무하던 대학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다. 재활치료를 꾸준히 받으면서도 A교수는 우울감과 자살충동 등을 느꼈고 우울증 치료제도 처방받아 복용했다. 하지만 뇌출혈 수술을 받은 지 3개월여 만인 지난 2019년 11월 29일, 세상을 등졌다.

A교수의 유족은 ‘직무상 재해’라고 주장했다. 만성 과로에 시달릴 정도로 업무량이 많았고 스트레스도 극심했다고 했다. 번아웃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도 있었다.

A교수는 소속 대학병원에서 이뤄진 신장이식 수술 대부분을 맡아서 했다. 주당 근무시간이 100시간인 적도 많았다. A교수가 근무한 대학병원은 같은 지역 대학병원들 중에서도 신장이식 수술 건수가 가장 많은 곳이었는데도 의료 인력은 가장 적었다.

유족은 A교수가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해 뇌출혈로 쓰러졌으며 이후 그 후유증으로 수술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했다고 했다. 그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유족은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에 직무상 유족보상금을 청구했다. 하지만 사학연금공단이 이를 부결하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직무상 재해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청년의사가 입수한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도 A교수의 업무량이 많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A교수는 지난 2017년 주당 평균 70~100시간 근무했으며 2018년에는 65~85시간이었다. 2017년에는 총 230회, 2018년에는 총 205회 휴일근무나 당직 등 특근을 했다.

하지만 직무상 재해는 인정하지 않았다. A교수가 뇌출혈로 쓰러진 2019년에는 “주당 평균 근무시간이 52시간을 넘는 경우가 없었고 당직업무에서도 제외되는 등 전체적인 업무량이 대폭 감소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유족은 A교수가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인 2019년 7월 6일 신장이식 환자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이로 인해 기저질환인 고혈압 등이 악화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환자 유족들이 특별히 민원을 제기하지 않았고 병원 측에서 진료비를 감액해 주는 수준에서 원만하게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며 “이와 관련해 A교수가 경위서나 시말서를 작성하는 등 문책을 당한 사실도 없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 이 사고가 질병(뇌출혈)을 유발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야기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오히려 기저질환인 이상지질혈증(고지혈증)과 고혈압을 뇌출혈의 원인으로 봤다. 재판부는 지난해 12월 15일 유족의 보상금 청구를 기각했다.

긴 근무 시간, 연구 압박 등으로 인해 '번아웃'을 상태에 놓인 교수들이 많다. 한국 의대 교수들의 번아웃 상태를 처음으로 연구한 결과가 국제학술지 'JKMS'에 발표되기도 했다.
긴 근무 시간, 연구 압박 등으로 인해 '번아웃'을 상태에 놓인 교수들이 많다. 한국 의대 교수들의 번아웃 상태를 처음으로 연구한 결과가 국제학술지 'JKMS'에 발표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의대 교수 3명 중 1명 번아웃…8%는 ‘자살 생각’

고원중 교수나 A교수에게 닥친 일은 동료 의사들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의대 교수 3명 중 1명은 번아웃 상태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고려의대 의학교육학교실 이영미 교수 등 공동연구진은 이같은 연구결과를 담은 논문 ‘Burnout of Faculty Members of Medical Schools in Korea’를 국제학술지 ‘JKMS(Journal of Korean medical science)’에 지난 3월 발표했다. 국내 의대 교수를 대상으로 번아웃 상태를 분석한 최초 연구결과다.

연구진은 지난 2020년 10월부터 12월까지 국내 의대 40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응답한 교수는 총 855명이었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30.4%는 주당 80시간 이상 근무하고 있었다. 감정적 피로도가 높아 번아웃 상태인 응답자는 34.1%였으며 66.3%는 자의식장애(Depersonalization) 상태였다. 개인 성취감 저하를 느낀다는 응답자는 92.4%나 됐다.

번아웃으로 인해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교수도 8%나 있었다. 0.6%는 자살을 시도한 적 있다고 답했다. 우울감을 호소한 응답자는 38.3%였으며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응답은 47.7%였다.

스트레스나 번아웃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는 정부나 대학의 과도한 규제를 가장 많이(69.2%) 꼽았다. 이어 너무 긴 근무시간(66.2%), 부족한 보상(64.4%), 연구 압박(64.1%) 등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연구진은 “의대 교수들이 상당한 수준의 번아웃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결과”라며 “의사 번아웃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이런 위험을 낮출 수 있는 의료정책이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은 “교수 대부분은 진료해야 할 환자가 너무 많고, 온콜(on-call) 상태로 대기해야 하고 중환자를 봐야 하는데 힘들어 한다”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으로는 음주와 음식을 선택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른 나라 의사도 번아웃 호소…美 매년 의사 300~400명 자살

번아웃을 호소하며 자살까지 생각하는 의사가 많은 것은 우리나라만은 아니다.

세계적인 의료 정보 사이트 ‘메드스케이프(Medscape)’가 지난 2020년 발표한 ‘전국 의사 번아웃과 자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의사 1만5,000명 중 42%가 번아웃 상태였다. 이들도 한국 의사들처럼 긴 근무시간과 너무 많은 업무량, 부족한 지원을 번아웃 원인으로 꼽았다.

또한 미국 의사의 69%가 번아웃으로 인해 우울감을 느꼈고 20%는 임상적으로도 우울증을 호소했다. 특히 13%는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으며 1%는 실제로 자실을 시도했다고 응답했다. 의대생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의대생의 10% 정도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는 보고도 있다. 실제로 매년 미국에서는 의사 300~4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 레지던트(전공의) 주요 사망원인 중 두 번째가 자살이기도 하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는 응답률은 28%였다. 이같은 프로그램을 제공한다고 해도 이용하지 않겠다는 응답자도 42%였다. 메드스케이프는 “많은 의사들은 그런 프로그램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직장 동료에게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했다.

비슷한 연구결과가 10여년 전 이탈리아에서도 나왔다.

이탈리아 사피엔차로마대(Sapienza University of Rome) 등 공동연구진이 지난 2010년 발표한 연구결과(Burnout, hopelessness and suicide risk in medical doctors)다. 연구진이 이탈리아 레체(Lecce) 지역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 133명을 대상으로 BHS(Beck Hopelessness Scale) 점수 등을 분석한 결과, 12.8%가 절망감과 자살 위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절망감이 높은 의사는 번아웃 상태도 심각했다.

연구진은 “번아웃은 자살 위험을 예측하는 중요한 인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번아웃은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을 악화시켜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번아웃을 줄이는 게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들이 업무 성과를 높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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