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에서 마지막까지 분만실 운영해온 (직선제)산부인과醫 김재유 회장
저출생·인력난 호소에도 '분만취약지' 아니라 지원 못 받는 현실
불가항력 의료사고 지원 등 무너진 분만 인프라 회복 대책 절실

지난 겨울, 경기도 안성시 마지막 분만실이 문을 닫았다. 이곳을 끝으로 안성 시내에서 산부인과 진료를 하는 의료기관 3곳 모두 분만을 포기했다. 인구 19만 '수도권' 도시가 아이를 낳으려면 다른 지역까지 가야 한다.

대부분의 분만의료기관이 저출생과 저수가, 인건비 상승, 전문인력 부족, 높은 근무 강도로 어려움을 겪는 만큼 앞으로 '마지막 분만실'이 문 닫는 지역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안성시에서 마지막 분만실을 운영한 모아산부인과의원 김재유 원장이 지난달 31일 의료전문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분만 인프라 회복을 위한 실효성 있고 광범위한 대책을 거듭 강조한 이유다. 수십 년간 지역을 지켜온 분만의들이 사명감으로 버티기엔 이제 한계라는 것이다. 김 원장은 (직선제)대한산부인과의사회 총무이사를 거쳐 지난 4월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때는 젊고 힘이 넘치고 바보 같았죠. 그래서 버틸 수 있었어요. 아무리 지쳐도 아기를 품에 안고 병원 문을 나서는 산모들 뒷모습만 보면 뿌듯했어요. 그냥 내가 산부인과 의사니까, 내 할 일이니까 하면 버텨졌어요. 하지만 십수 년 동안 혼자서 다 감당하라니까 어쩔 수 없이 지치게 되더라고요."

(직선제)대한산부인과의사회 회장을 맡고 있는 경기도 안성시 모아산부인과 김재유 원장은 지난달 31일 기자들과 만나 지역 '마지막 분만실' 문을 닫게 된 사정을 털어놨다.
(직선제)대한산부인과의사회 회장을 맡고 있는 경기도 안성시 모아산부인과 김재유 원장은 지난달 31일 기자들과 만나 지역 '마지막 분만실' 문을 닫게 된 사정을 털어놨다.

김 원장이 처음 안성에 자리 잡은 지난 2007년에는 이처럼 '바보 같이 버틸 수 있던' 분만의료기관이 전국에 1,027개가 있었다. 약 10년간 이 중 496개 기관이 분만을 포기했고, 문을 닫았다. 지난 2020년 기준 전국 250개 시·군·구 가운데 23곳은 산부인과 의료기관 자체가 없다.

전문의 수도 줄고 있다. 지난 2020년 신규 산부인과 전문의는 124명에 불과하다. 15년 전의 절반 이하다. 산부인과 전공의 57%가 전문의 수료 후 분만을 포기한다. 개원가 사정을 알기 때문에 이들 대부분 대학병원이나 서울권에 남는 것을 원한다. 15년 전 김 원장처럼 안성까지 올 젊은 분만의는 이제 없다. 모아산부인과에서 근무한 분만의 2명 모두 김 원장보다 나이가 많았다. 분만실 폐쇄 후 한 사람은 은퇴했다.

봉직의는 물론 분만실 직원 구하기도 어려웠다. 높은 근무 강도에 지원자가 없으니 최소 인원이 연장 근무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지역 내 유일한 분만의료기관'이 된 마지막 4년은 병원 전체가 책임감으로 버텼다.

그동안 시 전체가 분만의료기관 한 곳에 의지했지만 상응하는 지원은 없었다. 지난 2020년 시청과 보건소를 찾아 경영난과 인력난을 호소했지만 어렵다는 답만 돌아왔다. 정부 기준에서 경기도 행정구역인 안성시는 분만취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1년 후 분만을 그만둔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이번에는 공무원들이 찾아왔다. 분만실을 닫기 한 달 전이었다. 직원들도 이미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돕겠다는 말에 김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를 회상하면 "이제 홀가분하다"지만 분만실을 닫기로 결심한 뒤로도 몇 달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동안 공황 증상까지 겪었다. 의사로서 할 일을 저버렸다는 괴로움이 가시고서야 김 원장은 분만실을 닫을 수 있었다. 모아산부인과는 지난해 12월 진료를 마지막으로 분만실을 폐쇄했다.

"미련 남지 않았느냐고 하면 미련은 정말 없어요. 다시 분만하라고 하면 못 할 거 같아요. 산부인과 의사가 분만을 그만두면 축하받아요. 이상하죠. 근데 이게 바로 지금 산부인과가 겪는 현실입니다."

김 원장은 경영난과 인력난은 물론 법·제도적 지원 부재로 분만 인프라가 무너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김 원장은 경영난과 인력난은 물론 법·제도적 지원 부재로 분만 인프라가 무너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코로나19로 드러난 민낯…'기피과' 외면에 분쟁 보호장치도 없어

이렇게 무너진 분만 인프라 민낯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여실히 드러났다. 코로나19 확진 임신부가 입원할 병원이 없어 5~6시간을 떠돌다가 '길거리 출산'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안성시 이웃인 평택시에서도 재택치료를 받던 임신부가 헬기로 300km 떨어진 경남 창원까지 가야 했다.

재난 상황에서 버팀목이 되는 공공의료기관도 분만이 가능한 곳이 거의 없다. 김 원장은 2차 병원 가운데 분만이 가능한 산부인과가 서울의료원 단 한 곳인 점도 지적했다. 2차 병원은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중 최소 3개과를 개설해야 하는데 대부분 산부인과를 제외하고 다른 과만 개설하고, 산부인과를 개설하더라도 분만 기능은 갖추지 않는다. 의료진 확보가 어렵고 타산성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산부인과가 '기피과'가 되고 의사들이 분만을 포기하는 이유는 또 있다. 산부인과는 다른 과에 비해 불가항력 의료사고로 인한 분쟁이 빈발한다. 의사 입장에서 '무과실'로 떳떳해도 몇 년 이상 이어지는 공방에 지칠 수밖에 없다.

"산부인과 특성상 '무과실'이어도 환자 입장에서 마른하늘에 날벼락으로 받아들이기 쉬워요. 법원도 환자측에 온정적이고요.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 결과로 많은 의사가 분만을 포기하고 피하면서 인프라가 깨졌잖아요. 의사들에게 제대로 작동하는 최소한의 보호장치는 마련해줘야죠."

산부인과에서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제도' 개선과 '의료분쟁특례법' 제정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김 원장도 산부인과의사회장에 취임하면서 두 가지를 역점 사안으로 꼽아왔다. 의료분쟁특례법으로 불가항력 사고에 대한 의료인 형사처벌을 면제하고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제 한도를 상향해 실효성을 높이자는 주장이다.

"보상금 한도가 3,000만원이라 환자 대부분 조정이 아니라 소송을 택해요. 소송하면 최소 1억원은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요. 변호사에 따라 청구비가 10억원까지 가는 경우도 있어요. 환자가 수긍하려면 보상 한도가 최소 1억5,000만원은 돼야 한다고 봅니다. 의료기관이 30% 분담하는 보상금 재원도 국가가 책임져야 하고요." 

또한 다음 감염병 사태에 '길거리 출산'을 피하려면 300병상 이하 종합병원은 산부인과를 필수로 개설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했다. 

닫힌 분만실 다시 열 날 올까…"하염없이 기다릴 뿐"

지난해 12월 모아산부인과 분만실이 문을 닫고 반년이 지났다. 그러나 병원 건물 엘레베이터 안내판에는 '5층 분만실' 문구가 여전히 남아있다. 김 원장은 분만실 시설과 장비도 그대로 유지 중이다. "혹시나"하는 마음에서다. 직원들에게도 "분만키트 잘 소독해서 가지고 있으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모아산부인과 엘레베이터 안내판에는 5층 '분만실' 안내가 아직 남아있다.
모아산부인과 엘레베이터 안내판에는 5층 '분만실' 안내가 아직 남아있다.

"혹시 급한 산모가 찾아오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해요. 누가 갑자기 올지 모르니 응급 키트 꼭 챙겨두라고 하죠. 직원들한테 이 말 하면서 울컥하더라고요. 온 사람한테 분만 안 하니까 다른 데 가라고 돌려보낼 수는 없죠. 그게 의사이기도 하고요."

'5층 분만실' 문구를 차마 내리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혹시 필요한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언제라도 혹시 누가 (분만의를) 하겠다고 찾아올까 봐 그대로 두고 있어요.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는 거죠. 저 분만실을 다시 열어줄 누군가가 오지 않을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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