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연구 토대 만들기 나선 성소수자의료연구회
'한국형 성소수자 진료 가이드라인' 개발 추진
인식 개선 더딘 만큼 의료계·사회 함께 노력해야

편견이 지켜주는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있다. 동성간에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커플이라는 '오해'는 사지 않는 사회 인식이 투영된 표현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주요 정치 의제로 발돋움했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편견이 지켜지는 나라다. 성소수자가 있어도 내 주위에는 없을 거라는 편견. 병원을 찾는 환자 중에는, 진료실의 의사 중에는, 실습생을 지도하는 교수 중에는 당사자가 없을 거라는 편견. 그래서 성소수자 문제는 남의 일이라는 편견말이다.

자연히 '성소수자의료' 환경 구축도 더디다. 관련 연구자나 의료진도 적고 교육과 실습 기회도 전무하다. 유학 길을 밟거나 온전히 독학하는 수밖에 없다. 지난해 비로소 서울의대가 처음으로 성소수자의료 강의를 개설하고 교육 과정 논의에 들어갔다.

녹록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더딘 시계추를 조금이라도 앞당기고자 모인 의료인 단체도 있다. 지난 2020년 시작된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다. 서울의대에 개설된 '성소수자 건강권과 의료' 강의를 맡은 휴먼시스템의학과 윤현배 교수도 참여하고 있다.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에서 활동하는 서울의대 휴먼시스템의학과 윤현배 교수는 성소수자의료에 대한 관심과 발전을 위해 의료계와 사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에서 활동하는 서울의대 휴먼시스템의학과 윤현배 교수는 성소수자의료에 대한 관심과 발전을 위해 의료계와 사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성소수자의료연구회는 국내에서 성소수자 진료를 하는 이들이 만든 작은 모임이 시초다. 국내에 마땅한 지침이 없어 해외 사례를 참고하며 진료한 경험을 공유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윤 교수도 강의 준비 과정에서 연이 닿아 이 모임에 합류했다. 윤 교수가 합류하고 모임이 정기적인 성격을 띠면서 연구회 이름을 붙였지만 '정규 멤버'는 10명이다. 

"국내 성소수자의료 환경은 정말 척박합니다. 여기 모인 분들이 개척자나 마찬가지예요. 개원가에서든 대학병원에서든 오랫동안 꾸준히 성소수자의료에 관심을 가지고 진료를 보고 연구해 오신 분들이죠. 저는 오히려 후발주자인 셈입니다."

의사가 느끼는 척박함은 환자에게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성소수자도 똑같이 감기에 걸리고 암에 걸린다. 진단과 치료 방법은 같아도 환자가 지닌 정체성과 성적 지향 앞에 병원 문턱은 여전히 높고 진료 과정에서 무지나 무관심으로 인한 차별에 노출되기 쉽다. 호르몬 치료나 수술처럼 직접적인 ‘의료적 지원’이 필요한 트랜스젠더가 겪는 어려움은 더 크다.

진료 현장에서 의료인이 겪는 어려움도 있다. 트랜스젠더 진료는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시작으로 산부인과, 가정의학과, 내과 등의 호르몬 치료, 그리고 외과적 수술 3단계로 이뤄진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의료진이 길잡이로 삼을 진료 지침도, 국내 연구 사례도 없다. 적정 투약 용량조차 해외 사례에 비춰 현장에서 판단해야 한다. 의료진 간 소통 문제도 크다.

“미국 전문과 학회와 단체들이 트랜스젠더 의료적 지원을 위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국내는 아직 많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의사들은 배운 적도, 겪어 본 적도 없는 필요에 맞닥뜨리는 거예요. 막연히 거부감을 가지긴 쉬운데 의논하고 협력할 상대를 찾긴 어렵죠. 이런 환경에서는 환자도 힘들고 의료진도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형 성소수자 진료 가이드라인’ 개발이 급선무라는 것이 성소수자의료연구회 입장이다. 노하우 공유를 넘어 성소수자 진료 질 자체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진료 지침이 있어야 이에 맞춰 교육할 수 있는 영역도 넓어지는 만큼 성소수자의료 저변 확대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

“성소수자의료 환경이 개선되려면 우선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공급할 의사를 의대 수준에서부터 양성해야 합니다. 그 출발은 교육이고요. 이미 진료 현장에 나선 의사에게도 재교육 기회를 꾸준히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학회 역할이 중요하죠. 하지만 교육만으로는 실제 진료 현장에서 성소수자를 보는데 한계가 뚜렷해요. 그래서 진료 가이드라인 개발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 첫 단계로서 연구회는 회원들의 연구 성과와 경험을 담은 성소수자의료 도서를 준비하고 있다. 오는 6월 출간이 목표다. 진료 지침을 다루는 만큼 의료인이 주 독자지만 관련 정보를 구하기 어려운 당사자나 성소수자의료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입문서 역할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연구회 회원은 물론 외부 필진까지 뭉쳐 성소수자의료의 개론부터 진료 지침까지 한데 아울러 엮어낼 계획이다.

책을 출판하고 공감대가 형성되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의대 공동 교육 프로그램도 구상하고 있다. 대학들이 자료나 교수진 한계로 강의 개설이 여의찮은 상황에서 합동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돌아가며 토론과 실습 기회를 제공하자는 생각이다. 가능하면 개원가 등 대학 밖 연구자들도 강사로 참여하는 ‘오픈형’을 지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성소수자의료 연구 역량이 결집되면 연구 환경도 조금씩 개선되리란 기대도 크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교육하려면 관련 연구가 풍부해야 하는데 일단 국내는 성소수자의료 관련 연구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수술을 비롯한 치료적인 연구도 필요하고 정신 건강이나 삶의 질에 관련된 연구도 활성화돼야 합니다. 이렇게 연구가 쌓여야 성소수자의료도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어요. 교육이 기초를 다지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면 진료와 연구가 선순환 구조를 이룰 때 성소수자의료도 다른 의료 분야처럼 높은 수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성소수자의료연구회 세미나에 참가한 연구회원들(윤현배 교수 제공).
성소수자의료연구회 세미나에 참가한 연구회원들(윤현배 교수 제공).

물론 배경이 되는 사회·문화적 인식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가능하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이런 논의나 인식이 더딘 사회에 포함된다. 과거에 비해 동성애를 '병'으로 인식하는 정도는 덜해졌지만 여전히 커밍아웃한 자식을 '고쳐달라고' 병원을 찾는 부모가 있고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학생은 '불안정하고 어디 아픈 애'로 여겨진다.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르고 국제사회의 기대치가 상당한 나라지만 성소수자 인권이나 차별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습니다. 인식이 퍼지는 건 시간 문제기는 해요. 하지만 마냥 느긋하게 기다릴 수는 없어요. 그 사이에도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 시계추를 조금이라도 앞당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은 연구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다같이 해야 해요."

그래도 의료계 내 인식 개선과 발전 전망은 긍정적이다. 의료의 본질이 기본권과 맞닿아 있고 "환자를 성별과 종교, 인종 등에 관계없이 똑같이 대하라"는 윤리가 근간에 서려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러 학회에서 성소수자의료 관련 강의를 요청하는 경우도 늘었다.

"의료계가 보수적인 사회라고 해도 취약계층에 대해서는 필연적으로 관심을 가져요. '우리 사회의 특정 인구 집단이 의료적 혜택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다,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자살률과 우울증 발병률이 높다'고 하면 의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거부하지 않아요. 이런 관점에서 성소수자의료 분야가 뒤쳐져 있다는 문제의식에 공감대 형성도 빨라요. 아무래도 우리는 의사니까요."

하버드의대가 교내 LGBTQ 자문위원회(LGBTQ Advisory Committee)를 두고 성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윤 교수는 멀지 않은 미래에 의료계가 성소수자 의료와 사회·문화 전반에 목소리를 내고 관련 의제를 이끌 날도 그리고 있다. LGBTQ 자문위원회 위원 교수가 당사자이듯이, 의료계 내 당사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목소리 낼 날도 어서 오길 희망하고 있다.

"지난해 수업 관련 기사가 나간 뒤로 연락을 받았어요 본인이 당사자인데 기사를 보고 너무 반가웠다고요. 의대생 시절에는 자기 같은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전혀 가르쳐주지 않아서 답답했는데 이제는 졸업했지만 지금이라도 수업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연구회 내에 당사자 의료인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눴죠."

아직 성소수자의료가 낯선 의사들도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미 진료실을 다녀간 환자 중에, 앞으로 진료실을 찾아올 수많은 환자 중에 성소수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환자에게 최선의 의료를 행하고자 하는 의사에게도 성소수자의료는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성소수자는 존재합니다. 그 존재는 나의 신념이나 가치관으로 부인할 수도 지워버릴 수도 없어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면서 내 마음에 충족되는 특정한 환자만 치료하겠다고 맹세하는 의사는 없을 거예요. 우리 사회에 성소수자가 존재하는 만큼 나의 환자가 될 수 있죠. 언젠가 진료실로 찾아와 나를 필요로 하고 용기를 내 도움을 요청하는 날이 올겁니다. 그럼 의사로서 나를 찾아오는 모든 환자를 존중하고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다만 그날이 왔을 때 의사로서 미리 준비돼 있다면, 그렇게 나의 환자가 간절히 원할 때 의사로서 제대로 도울 수 있다면 분명 큰 기쁨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의사가 된 이유도 바로 이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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