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크론 유행하자 서둘러 BCP 마련한 한국
미국·유럽·일본, 2년 전 BCP 마련해 공유
위기단계별 치료 우선순위, 연명의료 결정 등 담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길어질수록 ‘인력 갈아 넣기’로 유지되는 의료체계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의료기관별 업무연속성계획(Business Continuity Planning, BCP)이 대표적이다.

비상 시 필수 진료기능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감염된 의료인의 격리 기간을 줄여 ‘정상 진료’하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병원 내 의료인 감염 비율이 올라가면서 상당수 의료기관들은 이미 확진된 의료인의 격리기간을 3일까지 단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정부가 마련한 의료기관 BCP 지침에 따른 것이다. 정부는 코로나19 확진자 수와 의료 인력 감염 비율을 고려, 1~3단계로 대응하도록 지침을 마련해 의료기관에 배포했다. 세 차례 지침이 개정되면서 코로나19 위험도가 가장 높은 3단계일 때 확진된 의료인은 3일 격리 후 무증상이거나 증상이 호전되면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무증상이 아니더라도 해열제를 복용하지 않고 24시간 동안 발열이 없고 코로나19 관련 증상이 호전 중인 의료인은 근무를 시작하도록 한 것이다.

3월 들어 확진된 의료 인력이 늘면서 현장에서는 BCP가 병원 내 집단감염을 유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노조들은 병원도 강하게 비판했다. 병원 측이 진료 축소 등 업무는 줄이지 않고 BCP를 악용해 의료인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했다.

보건복지부 중앙사고수습본부는 지난 22일 '병원내 의료진 감염 대비 의료기관 업무연속성계획(BCP) 지침' 제3판을 의료기관에 배포했다.
보건복지부 중앙사고수습본부는 지난 22일 '병원내 의료진 감염 대비 의료기관 업무연속성계획(BCP) 지침' 제3판을 의료기관에 배포했다.

“몇 주 만에 BCP 만들었다고 하니 외국 의사들 놀라더라”

병원 측도 억울해 했다. BCP에 대해 논의할 시간도, 환경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정부가 마련한 지침대로 운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BCP 지침을 처음 공개한 시기는 오미크론 변이 유행이 한창이던 지난 1월말이었다.

한 대학병원 고위 관계자는 “다른 나라에서는 몇 년 동안 고민해서 BCP를 수립하는데 우리는 몇 주만에 수립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동안 이에 대한 논의도 진행된 적이 없었다”며 “방역 당국이 BCP 제출을 서두르라고 해서 중앙사고수습본부가 제시한 지침대로 마련해서 제출했다”고 말했다.

그는 “운영 가능한 BCP를 수립할 시간도 없고 인프라도 부족하다. 의료 인력 감염률이 올라가면서 일부 병동을 닫느냐, 마느냐 전략 밖에 수립할 수가 없다”며 “필수 진료 기능을 정하고 그에 따라 어떤 환자를 받지 않을지도 병원이 결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해외 병원들을 보니 이미 재난 상황 대응 방안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에도 이를 활용했다고 들었다”며 “우리는 2~3주 안에 BCP를 마련해서 제출해야 한다고 했더니 불가능한 일이라며 놀라더라”라고도 했다.

미국·유럽·일본, 이미 2년 전 병원 BCP 수립해 공유
치료 우선순위, 연명의료·완화의료 결정 등도 담아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마련한 의료기관 위기 대응 지침은 의료인 격리 기간에 초점이 맞춰진 우리나라 지침과 달랐다. 코로나19 환자가 급증하고 직원 감염률이 올라가는 등 의료 역량을 초과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적용할 수 있는 치료 우선순위, 연명 치료나 완화의료 결정 과정 등이 담겼다.

미국 뉴욕시 보건국(New York City Department of Health and Mental Hygiene, NYC Health)은 지난 2020년 4월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관리 지침(COVID-19 Pandemic Patient Surge: Preparing for Crisis Care)을 마련해 공유했다. 당시 뉴욕은 코로나19 환자 폭증으로 의료 붕괴 위기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 지침에는 코로나19 치료 병상 확보 방안 외에도 의료 인력 충원 방법과 치료 우선순위나 연명의료, 완화의료 결정 등에 대해서도 명시됐다. 특히 코로나19 환자 급증으로 의료 인력이 부족하면 은퇴한 임상의사, 연구원 등으로 ‘버디팀(buddy-team)’을 구성해 활용하도록 제안했다. 의대생과 간호대생 등도 활용하도록 했다.

또한 위기 상황에서는 생존율을 높이고 사망률을 낮추는 방향으로 우선순위를 정해 의료자원을 제공하도록 했다. 지침은 ‘재난 발생 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인공호흡기 없이 생존할 가능성이 낮은 환자는 치료 우선순위가 가장 낮다’고 했다.

유럽질병관리예방센터(European Centre for Disease Prevention and Control, ECDC)는 지난 2020년 3월 마련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비상 시 필수적이지 않은 모든 활동은 취소하고 아픈 직원은 코로나19 환자 진료보다는 백업팀에 포함시키라고 안내했다. 또 퇴직 의료인 등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했다.

일본도 ‘매뉴얼의 나라’답게 일찌감치 코로나19 관련 병원 BCP를 마련했다. 일본 후생성 산하 기관이 지난 2020년 마련해 병원에 배포한 BCP 지침은 위기 단계별로 외래나 입원 진료에서 제한할 부분을 명시했다. 가장 높은 3단계에서는 직원 감염이 발생한 부서는 신규 입원을 중단하되 일주일 안에 수술해야 하는 위급한 환자는 다른 쪽으로 보내도록 했다. 직원 감염이 발생하지 않은 부서도 중환자나 응급환자만 입원하도록 제한한다. 이는 외래 진료에도 적용된다.

확진된 직원 조기 복귀용으로만 활용하는 한국

반면 우리나라는 코로나19 환자 급증에 따른 치료 우선순위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 대한중환자의학회가 지난 2020년 8월 재난 상황 시 중환자실 입·퇴실 우선순위를 제안했지만 정부 차원에서 논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만 걷고 있다.

이 때문에 2년 넘게 코로나19가 유행하고 확진자 폭증으로 다른 나라들이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를 지켜봐왔는데도 ‘불구경’하듯 바라볼 뿐 대비책은 마련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러면서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인한 위기 상황을 넘기기 위해 ‘인력 갈아 넣기 전략’만 쓴다는 것이다.

서울아산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김미나 교수는 “하루 수십만명씩 발생하는 확진자 중에는 임신부, 암환자, 응급수술 환자 등도 있다”며 “병원 BCP는 이런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필수인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BCP 첫 단계는 불요불급한 외래 진료와 수술을 줄이고 그 인력과 시설로 코로나19와 관련 없는 위중증 환자를 진료하도록 조치하는 것”이라며 “지금은 그저 확진된 직원을 빨리 복귀시키는 기회로만 이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BCP 2단계나 3단계로 상향하는 전제는 필수 기능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수적이지 않은 기능은 줄이고 대체 불가능한 필수 인력 등 의료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해야 하지만 이런 조치를 했다는 의료기관은 없다”며 “정부가 국민에게 평상시처럼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것을 참아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코로나19를 비롯해 모든 위증증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데 의료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래야 사망자를 줄일 수 있고 현실화되는 의료붕괴 위기를 막아낼 수 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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