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야 산다② 환자중심 서비스디자인 적용하는 고대의료원

 

혼돈의 병신년(丙申年)이 지고 정유년(丁酉年) 새해를 맞았지만 대내외적인 상황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많은 기업들이 새해를 맞으면서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며 변화와 혁신을 강조했다. 이는 의료계도 마찬가지다. 청년의사는 새로운 시도로 변화를 추구하는 사례들을 찾아 그들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1. 홍길동씨는 자정 무렵 복통이 심해져 아내와 함께 집 근처 응급실을 찾았다. 입구에 도착해 증상을 설명하니 간호사가 응급실 진료카드 한 장(사진)을 발부해준다. 거기에 인적사항을 적어 제출하자 간호사는 카드 절취선을 뜯어 나머지 부분을 되돌려 줬다. 진료를 받기 위한 등록 절차가 끝났다고 했다. 돌려받은 카드에는 진료 순서가 안내돼 있어 앞으로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홍씨는 응급실 병상에 누웠다. 그가 배정받은 곳은 경증환자들이 있는 B구역. 주변을 둘러보니 중증환자들이 있는 A구역은 빨간색, 경증환자들이 있는 B구역은 노란색으로 알아보기 쉽게 구분해놓았다. 마침 문의사항이 생긴 홍씨의 아내는 B구역으로 표시된 의료진 데스크로 가서 바로 안내를 받았다. 이후 의료진은 진료를 진행하면서 카드에 해당 순서를 체크했고, 덕분에 홍씨와 아내도 다음 단계를 준비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

고려대의료원 응급실 진료카드

긴 대기시간과 부정확한 정보전달 그리고 번잡한 응급실. 그동안 환자들은 어느 병원 응급실을 이용하든 이런 불편들을 겪어야 했다. 고려대의료원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지난 2014년부터 고대안암병원 응급실에 서비스디자인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위에 나온 홍길동씨의 이야기는 고대안암병원 응급실에 도입된 서비스디자인이 환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설명하기 위한 예시이다.

고대의료원은 응급실을 위해 진료카드 발부, 병상 구역 분류, 사인시스템 개선이라는 처방을 내렸다.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거나 첨단기술을 도입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처방은 환자들에게, 그리고 병원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상황파악도 못한 채 무작정 기다리기에 지쳤던 환자들은 진료 순서와 소요 시간을 예상하기 쉬워졌고, 환자들의 불만이 해소되면서 의료진은 진료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후 의료원은 서비스디자인의 적용대상을 고대안암병원 전체로 확대했다. 환자 중심 병원을 만들기 위해서다. 

서비스디자인의 본질은 환자의 안전

고대의료원 홍보팀 미디어파트 최정민 차장은 사용자경험(UX, User Experience)과 서비스디자인 분야 전문가로 지금까지 의료원에서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최 차장은 “무엇보다도 환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이에 대해 병원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다들 적극적으로 디자인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어린이병동이 이런 의료원의 신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어린이병동은 실내 공간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조성돼 있었다. 복도 벽을 따라 동물 그림들이 줄지어 있고 글자를 모르는 아이를 배려해 코알라, 여우와 같은 동물 캐릭터로 각 병실을 구분 지었다. 주사를 맞기 싫어하는 어린 환자들을 달래기 위해 처치실 천장에 날아다니는 새 모양의 모빌을 달았다. 병동 곳곳에서 의료원의 세심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동물원 콘셉트가 이 병동의 전부는 아니다. 진짜 변화는 병실 안에 있었다.

2015년 여름까지만 해도 당시 어린이병동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복도에 줄지어 놓여있는 수액거치대와 유모차였다. 아이들이 바퀴가 달린 수액거치대에 올라타 장난을 치거나, 복도에서 놀다 유모차와 부딪히는 등 아찔한 순간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병실에는 수액거치대와 유모차를 보관할 공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복도에 세워놨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료원이 내린 결정은 각 병실의 병상 수를 줄이는 것이었다. 병상 하나를 빼는 대신 그 자리에 수액거치대와 유모차를 보관할 공간을 마련했다. 하나 있던 1인실은 아예 상담실로 그 용도를 바꿔 환자와 보호자들이 의료진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병상 수가 곧 수익과 연결되는 의료 현실을 감안하면 과감한 결정이었다. 

환자를 생각한다면 누구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고대의료원이 추진해온 서비스디자인은 의료진을 비롯한 많은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해 이뤄졌다. 바쁜 시간을 쪼개 리서치와 아이디어 회의를 함께한 것은 환자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 차장은 “서비스디자인에서 디자이너 역할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환자들을 위한 아이디어가 있고 그것을 공유할 수 있다면 우리 의료원에서는 누구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고대의료원에는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있다. 2012년부터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학생들은 고대안암병원의 서비스디자인을 주제로 한 졸업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디자인조형학부 이태일·유승헌 교수가 제안해 시작된 졸업전시회 덕분에 의료원도 지난 4년 동안 학생들의 참신한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 방안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리고 고대안암병원과 고려대 의과대학은 이번 겨울방학 동안 ‘헬스케어 서비스디자인 연구회’를 운영한다. 연구회는 의대 본과생들이 고대안암병원의 서비스디자인을 계획하는 프로그램으로 임춘학·손호성 교수가 지도하고 있다. 현재 학생들은 의료원의 회진 시스템과 산부인과 병동을 주제로 리서치 및 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회를 통해 서비스디자인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장래에 의사가 될 학생들이 지금부터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가짐을 지닐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의료원은 고대안암병원을 테스트베드로 삼아 앞으로 성공사례를 고대구로병원과 고대안산병원에도 적용할 방침이다. 고대안암병원에서 효과를 봤던 응급실 사인시스템은 이미 고대구로병원에 도입됐다.

고대의료원의 서비스디자인이 다른 병원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교육·연구·진료의 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병원이기 때문에 서비스디자인에 교육과 연구, 진료를 통합해 적용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합의를 이끌어 냈다. 고대의료원 산하 병원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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